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피트 (문단 편집) == 생애 == 1759년, 켄트 주의 하이즈에서 아버지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와 어머니 헤스터 그렌빌[* 8대 총리 조지 그렌빌의 여동생이다. 사촌인 윌리엄 윈덤 그렌빌 또한 19대 총리이다.]의 3남 2녀 중 넷째, 아들 중에선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병약하였다고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펨브로크 컬리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고, 정계에 진출해 22세에는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휘그당]]에서 찰스 제임스 폭스와 대립하여 갈라져 나와 [[토리당]]의 당수가 되었고, 당수로서 1783년 12월 24세의 나이에 영국 최연소 수상이 된다. 사실상 정치 신인이 운좋게 정권을 잡은거라 피트의 안티들은 어린 그가 뭘 할 수 있겠냐며 내각도 금방 무너질 것이라는 식으로 비웃었지만, 세간의 예상과 달리 그는 17년간 정권을 잡는다.[* 이는 당시 영국 정계의 복잡한 상황과도 연관이 있는데, 일단 휘그당이 수십년 장기집권하던 시대가 마감되고 1770년 휘그당에서 나온 프레데릭 노스가 총리에 취임했지만 미국 독립 전쟁 등으로 민심이 악화되자 사퇴했다 얼마 안가 휘그당의 찰스 제임스 폭스와 연합해 이른바 폭스-노스 연합 정권으로 내각에 다시 들어오게 되는데,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였던 폭스를 싫어한 왕권강화주의자 조지 3세는 노스에게도 분노해 1783년 당시 정치 신인이라 할 수 있는 소 피트를 수상에 임명하는 정치적 모험수를 둔다. 허나 피트의 지지층은 의회내에서 소수였고 폭스와 노스의 지지자들은 당연히 이를 위헌이라고 생각해 수상임명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안을 계속해서 통과시킨다. 허나 이게 일종의 어그로를 끌었는지 어쨌는지 부패 스캔들까지 터져 휘그당이 쪼그라드는 1784년 선거를 기점으로 피트주의자들은 의회 다수파가 되고, 이후 찰스-노스 세력 vs 피트 세력간의 싸움이 18세기 내내 지속된다.] 1801년 수상직에서 물러났으나 1804년 다시 선임되어 2기 임기를 시작하였고 1806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역임했다. 재무장관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피트가 재임한 [[조지 3세]]의 재위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큰 사건들이 있었다. 피트는 이런 전쟁들과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식민지 [[무역]] 단절 등으로 국가[[부채]]가 쌓인 영국의 경제를 재건하는데 힘썼다. [[자유무역]]을 선호한 그는 프랑스 등과 낮은 [[관세]]로 협정(1786)을 맺었으며, 여러 [[간접세]]를 도입했고, 1799년에는 연 200파운드 이상 수입에 대해서 10%의 [[소득세]]를 도입해서 [[전쟁]] 비용을 충당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피트는 '대프랑스 동맹'의 중심이 되어 국내의 [[개혁]] 운동과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했다. 1801년 아일랜드 합병 과정에서 [[가톨릭]] 해방을 주장하다 이를 거부한 [[조지 3세]]와 사이가 멀어져 물러났지만, 새 내각의 실패로 1804년 다시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거국 일치 내각은 지지부진했고, 1805년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의 활약으로 큰 승리를 거뒀음에도 대프랑스 동맹은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이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후[* [[아우스터리츠 전투]] 소식을 듣고는 24시간 동안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고 하며, 이를 딴 '''아우스터리츠 안색'''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2개월이 채 안되어, 젊다면 젊은 40대 중후반의 나이에 '''[[사망]]'''했다. 물론 이 충격만으로 [[쇼크]]사했다기보단, 오랜 공직 생활에서 이미 누적된 [[과로]]에다가 평소 과도한 [[음주]] 등이 겹쳐 건강이 꽤 나빠진 상태에서 유럽 전선의 암울한 전망까지 겹쳐지자 심신이 버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과 하직하기 전 "[[지도]]를 치우게. 앞으로 10년 동안은 필요없을 거야(Roll up that map; it will not be wanted these ten years)."라고 탄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들어갈테니, 굳이 지도로 국경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 영국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이기고, '''[[로스차일드 가문]]이 대불동맹 각국에 사실상 무기한으로 빌려준 막대한 자금 지원을 끼고도''' 대륙의 판세가 한방에 나폴레옹에게 넘어갔으니 충격을 안받는 것이 더 이상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